나의 이야기

기이한 東家食西家食 (부제/기이한 감악산 양가산댁 108)

흰코끼리 2024. 7. 11. 19:05

처갓집 기본 상차림인데
진수성찬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니 왜냐하면
상다리가 휘고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백년손님?이라 그런지
어떤지 장모님은 항상 잘 대해주신다.
모두 맛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최고는
일년중 홍어를 먹을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라는 사실.
육해공군 집합.(결혼 초기시절,

장모님 가라사대, 홍어를 가리키시며
"채서방은 거시기를 먹을수 있을랑가?"
나 왈, "그럼요, 없어서 못먹죠.ㅇㅎㅎ"

후포항 언덕위에 용궁횟집. 별나게도 이날은 전날 절벽위의 식당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먹는 꿈을 꾸었다.
신촌궁에서 대비마마표 상차림이다. 지금도 엄마의 상차림이 간절하다.
조촐한 상인데, 분위기로 보면 전날 자고 아침상으로 차려주신 것 같다.
남대문과 만리재 길을 이어주었던 고가도로가 새단장 했다기에 시작된 나들이가 남대문 시장까지 가게되었다. 그렇게 해서 먹게된 만두였다. 여러달이 지난후에...시장에 들를 일이있어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대비마마를 모시고 고기창고에서 쌍둥이들과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가게된 어버이날에
낙성대역 근처 초밥집이다.
봉천동 회식을 여러번
이 곳에서 했다.

대비마마께서는 음식을 손수하셔서 형제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삼남매와 정다운 식사 장면이다.
손녀딸과

대비마마의 식사 모습이...ㅇㅎㅎ

장기역 근처 먹자골목 전주 콩나물국밥집이다. 반찬이 단품인 곳에서 깍두기는 중요한데 항상 시큼함이 과하다. 6,000냥부터

24시간 편의점에서
집밥?과 라면이다.
이거저거 귀찮을때...먹을만했다.
여러 해전에  대비마마께서도
이런 편의점 도시락을
드셨었다.그래서
나 왈, " 엄마, 식사를 왜 이렇게 하신당가?"
엄마 왈, "왜...고기에 여러가지
있고 먹을만한데..."
ㅎㅎㅎ
7,000냥

거래처 삼부 직영식당이다.나무랄데없다. 7,000냥
사무실근처 중국식당. 청년 주방장과 부인일지 새댁같은 분이 홀써빙을 했다. 짜장면 6,000낭부터 ...위에 것은 삼선짜장인데 9,000냥?

통진 48국도 큰길가 식당이다. 젊은 처자 둘이 홀서빙을 했고 어머니?로 추정되는 할매 두분이 주방에 계셨다. 샐러드와 과일이 항상 있다. 라면이나 국수를 직접 조리 할수있다.
9,000냥

거래처인 초원옆에 식당이다. 소박한 식단인데 메밀전병과 물미역이 마음에 들었다.
사모님은 주방에서,
사장님은 홀서빙을 하셨다.7,000냥

거래처인 성민옆의 식당이다.
수박에 계란을 두개나 주셨다.
늦은 점심이어서
넓은 식당을 독차지?
하는가 했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왔다.
내가 들어가는 곳에는
100%?는 아니지만
손님이 추가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비마마께서도 당신이
그런 경우라고 평소 강조하셨다,
그래서 왕왕 동네 상인들에게
다음 손님 오실때까지
제한된 인질?이 되기도 하셨단다.)
친절하신 사모님이셨는데
부군께서 설걷이를 하셨다.
7.000냥

7년을 훌쩍 넘도록 먹던
식당을 퇴짜놓고
동가식서가식을 한지
여러 달이 됬다.
노마드?도 아니고
그래도 매일매일
오늘 점심은 뭘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ㅎㅎㅎ
@뱀다리
1.언젠가 책에서 봤는지 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내용이다.
일본애들중에 식민사관에
쩔은 이들이 하는 말중에
"한국사람은 밥을 많이 먹는다.
그래서? 미련하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은
개화 초기 선교사들도
유사한 말을 다수했었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니
조선왕조말에 민중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서
밥한끼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일부 권력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할배,할매들은
밥 한끼가 생겼다면
이른바, 고봉에
소나기밥을 드셨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은
의심을 많이한다."라는
말도 했는데 수탈당하는
민중들의 삶이
달콤하고 별세계?의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까?
이미 우리 할매 할배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래전 체득했을 것이다.
(줄줄이 달린 식솔들은
건사하려면
"꺼진 불도 다시보고
돌다리도 두드려보자."
라는 말은 금과옥조를 넘어
하나님에 부처님 말씀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불과 수십년전의
북한의 김일성이
"이밥에 고기" 운운한거며
남한의 박정희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래도 박통이 밥은
먹게 했잖아..." 등도 그렇다.
음식평론가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산업사회전에
다수의 민중들은
하루에 밥한끼 먹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하기야 우리집도
감악산 산골에서
말그대로 호구지책이
난망하여 다른이들처럼
서울로 어머님의 삼촌이 계신

신촌으로 조부님을 모시고
이사를 오신 것이다.
처가에 외가등 많은 이들이
밥한끼와 자식들의 교육등
여러가지 문제로 고향을 등지고
지금의 대처로
"엑소더스"한 것이니...
밥한끼의 이야기는
이처럼 슬프고도
사연깊은 석가탑이었던 것이었다.
2.처갓집과 신촌의 외식은
장모님과 어머님의 노쇠함과
일부 연결되었다.
우리나라 특유의 가짓수가
많은 음식을 밥상에 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혼자서 한다면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어버이날이나 생신등
특별한 날에는 외식을
하자는 쪽으로 합의해서
여러 해전부터 양가가
그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