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화문을 생각하다.

흰코끼리 2010. 8. 19. 20:17

광화문

9.1(9명) 평가하기 | 리뷰 9 리뷰 남기기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분류
문화, 예술 > 전통문화 > 문화재
소개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의 남정문

상세정보

상세설명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기 이전의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궐(三闕)의 홍예(虹朗)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두공(枓?)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당초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백과사전

광화문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Current event marker.png 이 문서는 계획되었거나 공사 중인 건축물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건설이 진행되면서 더 많은 정보가 공개되면 문서의 내용이 바뀔 수 있습니다.
Applications-development current.svg
Nuvola filesystems folder blue open.png 경복궁 > 광화문
복원전의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출처 필요].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목차

[편집] 역사

광화문은 조선 초기에 경복궁을 지으면서 같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이 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1].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아뢰고 복명함이 다 이 문으로 들어와서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정도전

임진왜란경복궁과 함께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구한말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되었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그 위치가 옮겨졌으나, 한국 전쟁때 목조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2]. 이후 1968년에 석축은 그대로 두고 현판은 새로 만들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자리는 경복궁의 본래축이 아닌 총독부건물의 축에 맞춰 재건축하였으나[3], 건축 전부터 겉모양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4]

1995년문민정부에서는 2003년부터 광화문을 철거하고 2009년까지 본래의 위치에서 석축 위의 목조 건물로 복원할 것을 발표하였다.[5]

2006년문화재청 주도의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 · 해체하였다.[6] 광화문 복원 사업은 2010년 10월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7] G20 서울 정상회의의 개최로 인해 앞당겨져 8월 15일 광복절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광화문”이 복원 되었다 해서 휴가차 서울에 나왔다.

아이들하고 볼링도 하고 수영도 해서
나름으로 “아빠흉내”는 내었다.

어제는 이웃에게 “봉사활동”정도로 하면 될것 같고

오늘은 어머니에게 “기쁨조?” 아니면 나에게도 “덤”같은

시간이 된것 같다.

 ...

광화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교보문고 앞에서부터

펼쳐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광화문이 보였다.

의도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무장인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정궁앞을 호위하는 듯 광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전에는 볼수없었던 물분수가 장군주위를

감싸고 (혹시 수군이었던것을 예시한 것인가?)

얼마를 걸어가니 세종대왕 동상이 다소 부담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색깔도 ...)

그 옆으로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오석으로 음각을 해서

정성스럽게 박석 깔듯 단정히 물이 흐르고 있었다.

광장 바닥 이곳 저곳에는 밤을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디자인의 고민인지 여러 크기의 조명등이

보일듯 안 보일듯 게눈처럼 숨겨져있다.

그렇게 광장을 지나가니 작년인가 스노보더들의

활강장이었던 꽃밭인지 잔디밭인지 직사각형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기억이지만 광장을 단장한 초기에는 다분히

사람들을 “관리”하려는 모습과 놀이동산같은

이미지가 가득했는데

(서울시청 광장과 너무 닮았다.)

지금도 관제이미지를 벗어난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광장이나 마당같은 자유스런 느낌은

당분간 어려울듯 보였다.

그러나 서울시청 광장이 바뀔 것이라는 애기가

있고 보면 광화문 광장도 꿈만은 아닐듯하다.

마침내 광화문의 위용을 보게 되었다.

좌우에 해태상과 월대(실측대로인가? 교통문제로 축소된듯하다.)가

보이고 난간도 생겼다.

그런데 “광화문 교통관제소”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정면의 좌측 해태상을 가려서 보기가 영 불편했다.

광화문 석조부분은 어찌된일지 새 건물처럼 돌의 면이나 색상이

어색했다. 고색 창연까지는 아니라도 “신축 건물”같은 모습은

나만의 느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의 깊이를 전혀 느낄수 없었다.

광화문을 통과해서 단정하게 깔아논 박석을 밟고 가니

흥화문 너머에 근정전 마당에

그 옛날 문무백관들이 홀을 잡고 표석(?)을 따라

도열한것이 보이는 듯하다.

광화문 주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해설사들의 설명을 듣는 모습은

여는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광화문을 돌아보면서 

주위의 복원된 건물들과 어수선한 공사중 상황이

생뚱맞게 “광화문 영화세트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계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수도 서울의 한양은 조선왕조 오백년과

시작과 끝을 함께 하였고

많은 역사가 그렇듯이

한때는 모두였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속에

새로 단장된 광화문 광장과 광화문을

비롯한 “조선왕궁복원 공사”가

당대의 위정자들의 공덕비 같은

“업적남기기”행사가 아니었으면

생각하며 진정어린 마음이라면

남녀 노소 누구에게든 가슴에 샘솟듯

소중한 두드림이 될것이라

생각된다.   

 

도장리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쓰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와의 만남  (0) 2013.02.04
시간의 속도와 무게  (0) 2013.01.15
연미정  (0) 2013.01.12
김진숙  (0) 2011.11.22
  (0) 201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