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을 3주만에 다시 들르게 되었다.
정환,원기형과 나 이렇게 셋이서
성벽과 동장대 그리고 공심돈과 장안문 ...
이번에 다시보니 팔달문과 장안문은
정면5칸×측면2칸의 10칸 중층 문루였고 누혈이 4개였다.
장안문같은 경우에는 좌우에 북동적대 북서적대가
있어 성문을 적의 공격에 대비한것이 눈에 들어왔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정면 3칸×측면2칸의 6칸이었다.
누혈은 2개였는데 전체적 비례로 보면 다른 문루 즉 강화내성문과 서울 4대문, 경북궁의 4대문과 서울 성곽,북한산성의 것들보다 유난히 크게 제작된것이 특징이었다.
생각해보면 10칸의 규모의 대문은 누혈이 4개였고
(서울의 숭례문과 흥인문 그리고 수원의 팔달문과 장안문)
6칸의 대문은 누혈이 2개였다.
(경북궁의 건춘문 북한산성의 대남문 사소문중 광희문)
또한 지붕의 형식은 공통적으로 "우진각"이었는데
팔작지붕이 아닌 우진각으로 한 이유가 있을듯하다...
북동포루?였나 벽체에는 독특한 문양을 보게되었는데
흡사 "십자가"와 같았는데 우연인가 아니면...
용주사의 해태 한쌍은 그냥 웃음이 절로 난다.
ㅎㅎㅎ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1790년(정 조14년)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의 명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이덕무, 박제가와 장 용영 장교 백동수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대의 군사무예교범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른 조선은 군사무예 정립의 필요성을 뒤늦게서야 인 지하고 조선, 중국, 일본의 무예 중 정수만을 골라 권법, 창, 봉, 검, 도 등 땅 위에서 행하는 지상무예 18기와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 등 말 위에서 행 하는 마상무예 6기를 합해 총 24기로 정리하고, 군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그림과 함께 한문/한글로 설명을 덧붙였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는 구한 말 구식군대가 해체될 때까지 조선 관군이 반드시 익혀야했던 무예로, 의병장들의 호국무예로 활용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무예24 기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
용주사는
원래 이 곳에 신라 시대인 854년에 지어진 괄양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고려 시대인 10세기에 확장되었던 기록으로 봐서는 고려시대까 지 번창하였으나
도중에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18세기 조선 시대에와서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다시 지어지게 된다. 1779년에 정조가 사 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한 뒤 근처 가까운 곳 에 있었던 괄양사 터 위에 새 절을 새우기 시작하여 1780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마쳤다. 특기할 것은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 며, 그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시주를 받아 충당하 였다.
숭유억불이 기본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였던 것 이 사실이다.
일반적인 절의 경우는 승려들이 시주를 받아 승려장인들이 설계와 시공 을 전적으로 담당하여 이루어졌지만,
용주사의 경우는 관아 주도로 비용 을 전국에서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관청을 담당하던 장인과 승려장인이 모두 참여하였다.
★ 조포사 ★
조포사(造泡寺)라는 뜻은 사실 두부를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였으며, 왕릉이나 원에 딸려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드는 절을 조포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즉, 능침사찰을 조포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조포사에는 신덕왕후 정릉에 딸린 흥천사와 봉국사, 경국사가 있으며, 성종 선릉에 딸린 봉은사, 세조 광릉의 봉선사, 그리고 이 용주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절들을 위축전, 자복사라고도 했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삼각산 화계사나 태조의 회암사 같이 조포사가 아니 더라도 개인적 후원으로 번성했던
왕실원찰도 있었다.
...
알수없는 브로그와 사전의 그림과 글을 일부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