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통교

흰코끼리 2013. 2. 18. 10:52

 

 

 

 

 

 

 

 

 

 

 

 

 

 

시청앞을 지나다 문득 몇년전에 보았던

광통교아래 "석물"이 생각나 청계천을들렀다.

 

"광통교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태종실록>

 

의정부에서 상언이 올라왔다. 정동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에 병풍석과 신장석으로 사용된 석물을 해체 운반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의정부의 이름을 빌렸지만 왕심(王心)을 읽어 내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는 귀재의 복안이었다...

태조의 두여인 신의왕후와 신덕왕후 그리고 이방원.

왕은 하나 그리고 왕이 될수없는 왕자들의 운명은

조선의 500년 역사는 말해준다.

태종도 조선초기를 정비하고 왕권을 바로세웠지만

계모인 신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사람이 무수히 다니는 다리에 "석물"을 쓴다는것과

광해군이 많은 업적이 있지만 유교 국가에서

계모였지만 인목대비를 폐위한것은 인륜과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신덕 왕후는 태조의 바램처럼 함께 안장되지못하고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되었고 "건원릉 "에 태조는

신의왕후와 먼길을 함께했다.

권력의 무상함이여...

 

추신@

봉분에 쓰여졌던 석물중 병풍석의 문양에

불가에서 쓰이는

금강저가 보이는데 가운데 "태극 무늬"가 보인다.

또한 신장석과 당초무늬가 보인다.

신장석중 하나는 거꾸로 놓았는데

무슨의미일까? "사무친 원한"의 표현인가?

유교국가에서 금강저와 신장석이라니

업보에 대한 미련일까, 불교 국가 고려에 대한 흔적일까?

 

"경진지평(庚辰地平)

계사갱준(癸巳更濬)

기사대준( 己巳大濬)"

광통교에는 교각에 해당하는곳에

위와같은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태종이후 세종과 영조, 정조등

여러 왕이 청계천 준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 정조 4년 (1775)

 

준천당상 구선복(具善復)을 종중 추고(從重推 考)하고, 도청(都廳) 윤수인(尹守仁)을 곤장을 쳐서 도태 시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올해에는 오래 가물어 당초에 장마로 흙탕물이 내려갔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도, 듣건대, ‘경진 지평(庚辰地平)’이란 네 글자의 비각(碑刻)이 거의 하나의 글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선조(先朝)에서 비를 세운 것은 어떠한 성의(聖 意)였겠는가? 그런데 수거(修擧)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이러 한 극도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준설"을 즉 하천관리를

잘못하여 책임을 물어 처벌을 했다는 말이다.

작금에 "사대강의 문제" 그시절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당사자는

간담이 써늘해서 제명에 살기는 어려웠을것이라

...

위에 내용을 독해하면 이렇게...

경진년에 바닥이 드러날정도로

계사년에는 다시 ...

기사년에는 크게 준설을...

 

서울 청계천 수표는 청계천(淸溪川)의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6각 방추형 돌로 만든 하천 수위계(水位計)이다. 조선 세종 때 측우기를 만들 어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을 확립하고, 아울러 청 계천과 한강 두 곳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재도 록 한 것이다. 세종 때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 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마전교(馬 廛橋) 서쪽에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 종 때 화강석 4각기둥에 눈금을 새겨 계량한 것으 로 높이 3m, 너비 20㎝이며,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주춧돌이 땅 속 깊이 박혀 있던 것이 다. 수표석 아래에는 ‘癸巳更濬(계사경준)’, 또 주 춧돌에는 ‘己巳大濬(기사대준)’이라고 청계천 바 닥을 걷어낼 때 바닥까지 흙을 쳐냈음을 밝히는 기 록을 음각(陰刻; 뚫을새김)했다. 이것에 근거하면 현재의 수표는 그 상한이 성종 때가 되고, 그 하한 이 기사년 즉 1749년(영조 25)이 된다. •감상 포인트; 돌기둥 양면에는 1척[21.5㎝]에서 10척까지 1척마다 눈금을 새기고, 3 6 9척에는 ‘O’ 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 평수(平水) 대 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 아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였다. 세종 때 나무 수표와 비교하면 촌(寸) 푼[分]까지 정확하게 측정 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가뭄과 홍수를 미리 예 견할 수 있어 실생활에 직접 이용된 한층 더 발전 된 것이었다. 수표는 조선 세종 때 세계 최초의 하천 수위계 전 통을 이은 유일한 유물로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원래 청계천 수표교 옆에 있던 것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공원에 옮겼다가 1973 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수표석"에 관한 내용이다.

측우기와 함께 강우량을 감시하고

그에 해당하는 부처가 있었다는...

 

알수없는 브로그 일부인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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