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글쓴이: 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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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2006.12.15 제639호]
주자학 유일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양명학 지지를 밝힌 정제두…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사대부에 반대하며 강화학파의 전통 수립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후기는 주지하다시피 주자학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자학은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자가 중세 학문계에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대학>이란 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학>은 <논어> <맹자> 등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지만 원래는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기>(禮記) 49편 중 한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학>은 주희(朱熹·주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대학> 자체보다 <대학장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시대에 주자를 비판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썼던 인물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였다. 정제두는 <대학서>(大學序)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간담이 서늘했을정도...
“대저 육경(六經)의 글은 해와 별같이 밝아서 아는 사람이 보면 절로 환한 것이라 주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훈고(訓?)만 있고, 주설(注設)은 없는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물리(物理)로써 해석을 하게 되니, 주(注)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고경(古經)이 변하게 된 까닭이다. 주자의 해석이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기었으니, 또 고쳐 해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주가 다시 지어진 까닭이다. …아! 변한 것이 없었으면 일이 없을 것을 변한 것이 있으니 되돌려놓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이것을 알면 나의 죄를 알아줄 것이다.”(<대학서>, 정제두)
‘친민’과 ‘신민’의 차이
주희가 대학에 주석을 붙이면서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되찾기 위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정제두는 <대학> 본문도 주희와는 달리 읽는다.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과 친(親)함에 있으며(在親民),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대학>, 정제두)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예기>에 속해 있을 때 이 구절은 재친민(在親民), 즉 ‘백성과 친함에 있다’였는데, 정자(程子)가 “친(親)자는 마땅히 신(新)자로 써야 한다”면서 재신민(在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재친민과 재신민은 외형상 ‘친’(親)과 ‘신’(新) 자 한 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사대부 자신을 백성보다 우위에 놓고 백성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인 반면 ‘백성과 친함에 있다’는 사대부 자신과 백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민에는 인간을 존비(尊卑), 상하(上下) 관계로 구분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속뜻이 숨어 있다. 정제두는 신민을 다시 친민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제두가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전습록>(傳習錄)에서 “백성의 모든 곤고함 중에서 내 몸의 절실한 아픔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에게 천하 백성은 자신과 둘이 아닌 하나였다. 왕양명은 같은 책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천하의 인심이 곧 내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미친 자가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상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왕양명은 <전습록 서애록(徐愛錄)>에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곧 친민으로서 친민에는 백성들을 교화하고 함양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지만, 신민은 한쪽만 강조해서 치우친 것이다”라는 비판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 이황(李滉)이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일단의 학자군이 생긴다.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제두는 조선 후기에 유일한 외양내양(外陽內陽)의 선비였다.
정몽주의 11대손인 정제두는 종형이 영조의 부마이고, 부인이 윤선거(尹宣擧)의 종질이었던 서인 명가의 후손이었다. 이런 그가 시대의 이단이던 양명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고단했던 개인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16살 때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던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연보>는 백부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종손마저 어려서 그가 초상과 장례를 주관하여 치렀다고 전한다. 17살 때 맞이한 부인 윤씨는 23살 때 잃고 말았다. 어린 아들도 잃은데다 그 자신마저 병들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4살 때 대과에 떨어지자 정제두는 모친께 과거 공부 폐지를 간청해 허락받는다. 동생인 정제태(鄭齊泰)는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며 “형제가 모두 이록(利錄)을 일삼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이었으니 이미 세상 명리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포기했으나 문명이 높아가자 32살 때인 숙종 6년(1680)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4살 때는 뒷일을 아우에게 맡기는 글을 쓸 정도로 병이 위독했다. 이때 박세채(朴世采)에게 남긴 유언 비슷한 편지에 정제두는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밝힌다.
“제가 여러 해 동안 분발하면서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선생님께 모두 보여드리고 바른 길을 구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천리(天理)가 곧 성(性)이라고 하지만 심성(心性)의 뜻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문성(王文成·왕양명)의 학설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박세채에게 올리려던 글)
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인데, 예상과는 달리 병에서 회복되자 양명학자를 자처한 그에게 수많은 시비가 인다.
비판의 유형은 다양했지만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54살 때인 숙종 28년(1702)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숙(大叔·박대숙)이 말한 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대숙은 본설(本說)을 보지도 않고 한갓 자기 의견으로 억지로 논란한 것 같은데 이것을 어찌 명변(明辯)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왕씨(왕양명)의 설이란 것도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윤증에게 답하는 글)
정제두는 숙종 13년(1687)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달 민언휘(閔彦暉·민이승)와 더불어 수일 동안 고양(高陽)에서 만나 서로 토론한 일이 있습니다. …언휘는 늘 말하기를, ‘양지(良知)의 학문(왕양명의 학문)은 심(心)과 성(性)과 천(天)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 그의 이론을 듣고 저의 의혹을 좀 풀어볼까 했더니 정작 만나서 토론해보니 한마디도 요긴한 말이 없어 토론을 안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언휘는 양지의 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의 <연보>에는 그가 민성제(민언휘)와 ‘우의가 돈독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실은 달라서 그는 정제두에게 위협적인 편지까지 보냈던 인물이다.
“책 끝에 주륙(誅戮)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는데, 지금보다 더 나은 명변(明辯)이 있다면 지당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죽이고 욕보이겠다고 화(禍)를 입히는 것이라면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죽이고 욕보이는 것은 학문을 권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제가 아직까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 도가 어떠한지를 모르는 것뿐입니다. 만약 그 도가 진실로 옳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학문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도 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형은 어찌 나를 이렇게 낮춰보십니까?”(민성제에게 답하는 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대들었다. 정제두가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른 사상들을 용인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학문의 자세라는 것이었다. 그가 민언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비록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혼자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와 나의 구별을 될수록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시대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몰던 폐쇄된 시대였다. 숙종 22년(1696) 69살 노구의 윤증(尹拯)이 48살의 정제두에게, “전일(前日) 양명의 책들은 사우(士友)들이 걱정하던 바인데 지금은 혹 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우려한 것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조차 이런 논란에서 자유스럽지 못했던 현실을 말해준다.
정제두는 자신에게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며 당당히 맞섰다. 그는 박세채에게 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싸움은 오직 그 의리를 위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 때문은 아닙니다. 공론(公論)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 …대저 힘으로 이겨봤자 천하의 의리를 공정하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며 백 세 후의 시비를 바로잡는 데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박세채에게 답하는 글)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가 억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양명학이 갖고 있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사상 때문이었다. 왕양명은 사민(四民,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민의 역할에 대해서 이업동도(異業同道)라고 표현한다.
“옛날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이 했으니(異業而同道),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폈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장인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節庵方公墓表))
중요한 것은 이런 직업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각자는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마음 다하기를 구하였다. 이러한 직업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인(生人)의 도에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
이상설·박은식도 강화학파의 후예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겉으로는 왕양명의 ‘심과 성과 천’에 대한 사상을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은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天經之義)였던 것이다.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그의 사상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초청장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천거로 몇몇 벼슬을 역임했지만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뒤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도리어 그는 61살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의 <연보>는 이해 장손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독재가 구축되고, 주자학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학문의 자유를 위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 뒤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승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다거물이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 지향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뿐, 무욕(無慾)의 삶을 살았던 정제두가 젊은 시절의 잦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88살의 장수를 누린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
다음 카페인용.
오랫만에
"강화 나들길4코스"를 다녀왔다.
집에서 정제두묘를 돌아
원점 회귀하였다.
약 4시간을 소요했으니
모처럼 "유유자적"한 걸음이었다.
정제두묘까지
훌쩍 덮어진 녹색 터널을 통해서
으름과 노간주나무,산초나무,리기다소나무
참나무과 친구들과 진달래,덜꿩나무등...
여러 나무를 지나니
이윽고 "가능"이 보였다.
가능을 보면 항상 느끼는 단어는
"안타까움"이다.
왕비 묘(고려 24대 원종의 비이며
충렬왕의 어머니로 경순황후,정순왕후로 불린다.
고려왕릉은 대부분 북한에있으며
남쪽에 5기가있고 그중 강화에 4기가있다.)
입구 양쪽에 문인석 얼굴이 더욱 슬픈 표정이다.
일반 반가의 묘보다 나을게 없으니
"능"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가능을 지나 조금 더가니
반갑게 정제두묘가 마중나온듯 서있다.
세련된 정제두묘의 문인석이 눈인사한다.
가능과 정제두묘의 석물이
다시금 비교되었다.
가능의 석물이 초라한것은
고려왕조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불안한 내정과 관계된것이다.
조선왕조의 왕릉과
비교할것도 없이 정제두묘의
문인석과 비교해도
확연한 차이를 느낄수있기때문이다.
항상 오래된 석물과 유구를 보면
유홍준의 표현인
"폐허의 미"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유한한 인생이
절대로 도달할수없는
영원함을 탐하는
인간의 초라하고 가련한모습을
느낄때가 있다.
설령 그것이 위대한 예술의 길이요
본령일지라도...
오늘도
변함없이
꽃은 피고
녹음으로 가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