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서울遊遊13

흰코끼리 2023. 2. 12. 18:43

삼청동 계곡에서 내려온 물들이 주택가를 통과하고있다.
칠보사 아래 조그만 약수터가 있다. 사전 정보가 있었고 분위기는 별로였지만 주변에 김치찌게 식당의 사모가 위치를 손수 가르쳐주셔서 빗장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장소가 애매할때는 동네 어르신들께 읍소?하면 왠만큼 해결된다.)
雲龍川 바위글씨가 전서체였는데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며 나오는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조선 왕조 정조대왕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샘물이다.
샘물의 역사에 대한 안내문이다.
기천석 아래에 있는 한옥이 있는데 대문 좌우에는 "사괴석" 또는 사고석으로 담장을 이루고있었다.(사고석 담장은 궁중이나 권세있는 반가에서 썼는데 가로세로 6치,18×18cm 화강암을 사용하고 회로 줄눈을 넣어 장식미를 겸한 마감을 한다 .) 대문에 걸린 현판에 글씨는 좌로부터" 通玄門"이라 쓰여있었다. 예서체로 단정한 글씨였다.살림집인지... 어떤지,사람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대문안에서 흘러나왔다.
삼청동 칠보사.흔치않게 한글로 현판과 주련등이 쓰여있었다.한글로 현판과 주련이 되있어 보기가좋았다. 절터가 가람이라 할것도 없이 조그만 암자같았는데 기도사찰로 쓰여있었다.절과 관련되서 검색해보니 만해스님의 제자인 석주스님과 관계되어있고 큰법당에 보물로 등재된 목조여래석가좌상이 있고 500여년이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솔직히 별로 감흥은 없었다. 이유는 근처 바위글씨 찾는라 정신이 없었기때문이다. 혹시 대단한 역사와 볼거리가 있었다면 차분히 보았겠지만...한때 중세기 유럽에서 천주교는 신부외에는 성경과 같은 경전을 일반인들은 볼수가 없었다고한다.이유는 하느님의 뜻 운운하며 신앙을 사유화하고 "특정집단이 전횡"을 한 것이다. 불교나 이슬람도 유사 사례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한자 중심으로 된 불교문화도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것은 역시 문제가 많다고 본다.과거 제정일치시절이나 왕정국가에서 종교와 권력의 사유화는 전근대적인 유물이요,없어져야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21세기에도 이런 흐름이 단절되지않으니 문제다,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와 정치는 여전히 지구에 큰 골치거리오,해결난망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20일자 서울 신문 단독 기사로 "단재 신채호선생 집터"가 발견됬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지나간 칠보사 주차장이 그 곳이었다.세상에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의 집터를 무심히 지나갔으니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꼭 들러야겠다.)
" 祈天石 康日庵 徐月堂 함풍5년" 1855년(철종6년)에 토속신앙과 유.불.선을 상징하는 단어를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한다. (영월암과 숨바꼭질 하던차에 보게된 바위글씨다. 길이 막다른 곳에 있는데 어떤 답사객이 우측 하얀 대문이 "전인권" 집이었고 기천석 위에서 조금 더오르면 글씨바위가 한개 더 있다고한다. 오르막의 끝이었는데 다음에 확인 해봐야겠다.)
생각치 못한 단어와 얼굴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약산 김원봉선생을 권력의 심장부?에서 만나다니...그러나 이곳은 지금 남녀노소들의 요즘 말로 한참 뜨는 장소인거같다. 그런데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사람들이 길가에 걸려있는 걸개를 보며 주인공들을 잠시라도 생각해볼지도 모르니 말이다.
(본래 한국독립당은
일제치하 만들어진 정당이었는데
현재 삼청동의 한국독립당은
전혀 다른 도깨비?같은 정당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당의

정강.정책과 역사등 기본적인
행적이 모호했기때문이다.
그저 이름만 빌어쓴 모양인데...
아무튼 애국지사들을 욕되게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낮익은 도산 선생과
우국지사들을 뵈니 뭐랄까...생뚱맞게 선생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세번째 도전은 없었다. 불길한 느낌이 어른거렸으나 아침에 뵙고 온 대비마마의 기도빨인지... 영월암 바위글씨 위치 표시는 빨간색, 월암동 표시는 파란색으로 표시하였다. 위치는 종로구 삼청동 산 2-1로 11번버스 종점에서 하차후 오르막 직진으로 차로를 따라가면 좌측 위에 테니스장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좌측으로 길이 구부러지고 테니스장에 컨테이너를 지나면 *철책안에 오르막 경사지에 있다.
철책안에 각자 글씨가 어슴프레 보이면서 "드루와 드루와" 손짓?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월담을 했다. 주변에 눈치도 안보고 대놓고...ㅇㅎㅎ
와우! 이런 맛이다. 요즘 말로 하지면 삼청동은 바위글씨 맛집?이라할수 있다. 어떤 답사객은 월암동 글씨 수준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했지만 나는 글씨가 정감있고 귀여워서 좋았다.
그렇지, 月岩洞 각자가 아래있고 影月巖 바위는 위에 있다고 했으니 저것이 맞으렸다,오른쪽 소나무가 꿈틀거리며 용틀임했다.
와우와우...언제일지 영월암 글씨 오른 쪽에 석수가 돌을 쪼아냈던 흔적이 보였다.

드디어 만나게됬다.
오래된 연인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바위속에 글씨는 살아움직여 꿈틀거렸는데 붉은 주사의
기운은 벌써 내마음을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역시...
필체의 내공이 뭐랄까...
거침없는 기운이 바위에 넘쳐났다.
影月巖,뜻은 대략...직역하면
달 그림자 바위 이런건데...
광해군 시절 "이기설"이라는 문신이
인목대비 폐비후 은거하며
살았던 곳이란다.

석축위에 양식집이 섬처럼있었다. 건축양식이 일제시대 즈음이 아닐까..그런데 도로위에 집은 어린아이들이 길가에 노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고 위태로워보였다. 사유재산인듯한데 잘 가꾸면 괜찮은 볼거리가 되지않을까...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한국독립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다수의 항일무장투쟁도 하셨다.
우연히 보게된 글에서 오늘 일정에 이곳을 점찍었다.
금융연수원안에 북창/번사창이 있다.
오늘 예감이 좋다. 북창"번사창"은 영월암이 주는 선물?같다.
중국에 관광을 갔다가 근사한 집을 우연히 보게된다면 이런 느낌일지 모른다.
지금으로 보자면 국방연구소 비스무리...
맛배지붕의 전돌 건축물을 보니 상명여대입구 석파랑 별장이 생각났다.
환기를 위한 "통풍구"가 용마루에 업혀있다.

인왕산이 뒤로 보인다.
역시 오늘은 운수대통한 날이었다.

막다른 골목길이다. 저번주와 그전주까지 두번의 실패에 나는 생각해보았다."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그러나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에 오늘의 운?을 걸었다. 그리고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그래서 지형지물을 잘 관찰한뒤 결정했다. 첫째 과제는 바위글씨를 조망하려면 세멘트 담장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이었다.둘째는 그곳에 올라가려면 약 2~3미터 벽을 올라야하는데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였다.세째가...어려운 문젠데 사유재산이니 주거침입같은 법적인 문제였다. 네째는 안전사고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최대한 신속하게 ...릿지와 암벽등반의 일천한 경험이지만 초지일관에 일사천리해서 쾌도난마로...후다닥했다.
그래서 "三靑洞門 壬戌四月 刻" 삼수끝에 ...그런데 삼청동문과 세번째 도전이라...우연이겠지만 무슨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와우!..ㅇㅎㅎ
삼청동문을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을 보니 일어날 기색이 없었고 한복입은 외국인 부부도 웃으며 여유가 있어보였다.아이를 키워본 엄마,아빠들이라면 겪어보는 일이니 나 또한 웃음이 절로나왔다.
정독도서관앞 가로수에 옷을 입힌게 왠지 정겹다.
정독 도서관 일부가 "서울 교육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청년시절에 도서관을 다녔던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상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사회운동가로 신간회 창업회장에 초대되었다. 본래 이 곳이 아니라 가회동 주민센터가 집터였는데 알수없는 이유로 이곳에 옮겨져있다.
"헌법재판소" 내에있는 백송에 관한 설명이 쓰여있다.

"재동 백송"이다.
언젠가 본거 같기도 한데...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도 있는 것을 보았는데 푸른 수피가
나이를 먹을수록 흰색으로 변한단다.
(오동나무는 나이가 들면 심재부분에 구멍이 메워지고
엄나무도 나이가 들면
수피에 가시가 사라진다.)
600년이나 되는 노거수니
백발 할배가 된 것일까.
우리나라에 할아버지 나무는
보통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소나무 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백송을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 백송은

재동외에 종로 조계사,
고양 송포, 예산 용궁리,이천 신대리등
다섯 그루가 지정되어있었다.

외국인 아이가
엄마품에 안겨서 내려오고있다.

모르긴해도
관광에 신난 엄마아빠에게
아이가 힘들어서
안아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아이의 작전을 엄마는
모르는척하며
안아주었을 것이다. ㅎㅎㅎ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1910년 4월19일자 대한매일신보 3면에
" 본인소유 초가6칸의
집문서를 알지못하는
가운데 분실하였기에

이에 광고하오니
쓸모없는 휴지로 처리하시오" ...
경 북서 삼청동 2통4호
신채호 백 이라고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었다.
단재가 적시한 이 주소지는
여러 사람을 거쳐 현재 불교재단

법인이 소유하고 있고
칠보사의 주차장으로 쓰이고있다.
또한 집터의 소유권을 되찾으려는
선생의 유족들이 소송이 있었지만
국가가 사유재산을 찾아줄 의무가
없다며 원고 패소한바있다.
독립운동 전문학자인
신용하선생은 집터에 표석하나
없는 현실을 개탄하셨다.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헌법재판소 부지에는 이상재 선생외에 구한말 문신 박규수의 집터였고 광혜원이라 불렸던 조선 최초 근대식 병원이 있었으며 창덕여고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재동"이라 불리는 이유가 수양대군의 쿠데타였던 계유정난때 벌어진 살육으로 피비린내가 나서 나무들 태워 "재"를 뿌려 동네 이름이 그렇게 생겨났다고 한다.
1980년말 생활한복이 대학가에서 발원하여 90년대에는 정부에서조차 한복입기를 장려했다. 현재 고궁 주변에 한복입기의 원조격이었다. 나도 그 시절에 신촌에서 전통 찻집 "한"을 하며 생활한복입기 시대를 열었던 주인공 중에 하나라는 자부심이 있다. 아무튼 K팝같은 "한류 문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배력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한...가 미국 중심의 편향된 문화질서를 벗어나 다양한 문화시대를 여는 분수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삼청동문과 화기도감"이
그림밑 부분에 보인다.
옛그림으로 본 서울/최열
1780년대에 그린 "도성도"
작자 미상,서울대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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