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서울遊遊12

흰코끼리 2023. 2. 5. 18:36

생각보다 쉽게 찾았다. 카카오맵에 스위스 대사관을 찾아서 맞은편 길 건너 바위가 그것이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필력"을 느낄수 있었다.
스위스 대사관이라면 산자락에 조망 좋은 곳이 제격일텐데...아파트 숲속이라니 무슨 이유일까? 하기야 요즘 서울에서 인왕산 둔덕인 월암봉을 기댄 모습은 상상속에나 가능했겠지만...ㅎㅎㅎ
월암동 각자에 대한 설명이다.
화강암이 분홍색을 띠는 것을 보니 "정장석"이 많은듯하다. 북악산이 백악산으로 불리는 것이나 세검정의 백석동천같은 곳은 정장석이 적어서 하얗게 보이는 것이다.

인공구조물인 보강토와
월암동 바위의 대비가 뚜렸하다.
인왕산 주변에는 흔한 일이지만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일까?
아니면 차선일까?
현실은 과거의 결과요,
미래의 거울이다.
"반면교사"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장면 부통령은 생각나는 것이 별로없었다. 나의 무지겠지만...
어린시절 이런 손펌프는 서울과 시골에서 흔히 볼수있었다. 지금 처럼 상수도가 발달하기전에는 우물도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랑들이 "건수"를 먹었다.지하수가 오염된 지금은 ...쉽지않은 일이다.
한옥과 양옥이 나란이 서있는 모습이 흡사 건조한? 부부 사진같았다.화성인과 지구인의 차이는 아니겠지만...
어린시절 이런 풍의 대문은 흔한 것이었다. "보단"이라 불렸던 차임벨을 눌르고 냅다 도망쳤던 개구장이 시절이 생각났다.
장면부통령은 인근 동성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고한다.
"증주벽립" 각자바위는 종로구 성균관로 17길 37에 있었다.우암 송시열 집터로 뜻을 헤아리자면, 유교의 성현인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을 계승하여 흔들리지 않는 벽처럼 받들겠다는... (그런데 각자 바위 글씨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롱하듯 사방은 거대한 집과 콘크리트 벽의 포로가 되었다.그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말은 "사문난적 난신적자"이다. 불행하게도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어떤 이는 우암이 중국의 유학을 조선식 종교인 유교로 만든 인물이라고했다. 글쎄...우암을 논할만한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이른바 "예송논쟁과 붕당정치의 장본인이요. 조선시대 대표적 철학자이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사상인 유교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시대의 한계가 먼저겠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 백성들의 삶과 뚜렷한 상관 관계를 찾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최고의 명성을 가진 철학자에게 나는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인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것이다.그러나... 그에게 유학은 백성들의 삶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빅브라더"였을지 모른다. 유럽에서 카톨릭이 그러했고 이스라엘에서 유대교가, 동양에서 불교가 중동에서 이슬람이 그랬던 것처럼...

"금고일반"송시열의 말이라는데 변함없는 신념을 말하는 듯하다.그러나 변하지 않겠다는 뜻을 말함이겠지만 신앙도 그러했고 신념도 시대에 따라 변할수밖에없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같은 것들도 결국 "긍극"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레닌 동상이 사람들에게 끌어내려지는 것을 우리는 보질않았는가
천재암과 영반에 관해서 설명하고있는 비석이다.
天載巖의 상단에 금고일반이 쓰여있다.
천재암은 詠磐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노래를 하는 바위라는 뜻의 영반은 무슨 노래를 한다는 걸까? 소나무가 바위를 뚫고나왔다.
서울과학고등학교에 우암관이다.금고일반 각자 바위가 앞에있다.
한양도성길이다.
혜화문이다.몇해전...한양도성 트레일런닝때가 이곳에서 원점회귀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집터인 비우당뒤에 "자지동천 바위"가 숨어있는 모습이 수줍은 새색시같다. 어떤이는 바위를 비우당이 가린 것에 관해 이해할수 없는 처사라고했다.알고보니 비우당 건너편이 본래 집터였는데 아파트 신축때문에 현재 장소로 이사왔다고한다.내가 봐도 옹색한데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볼수는 없었다.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庇雨堂의 뜻은 "비를 피하는 집이라는 말로써 "조선 청백리중 한분인 유관이 증손녀 사위인 이수광 아버지 이희검에게 비우당을 물려주었고 그집이 아들인 이수광이 물려받은 것이었다.이수광이 선대의 검소함을 새기는라 본래의 초가를 간직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포탈사이트에 검색하면 생뚱맞게 "19금" 경고?문구가 나온다. 그리고 이곳을 들어가려면 월담을 해야한다. 이런 경험은 종종있으니 대?수롭지는 않았다.답사자로서는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는 거라며 관리자에게 속으로 쓴소리를 했다 .그러나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남대문 화재도 있고보면...
비우당뒤에는 자지동천의 유래가 된 샘물이있다.
샘물은 단종의 비인 여산 송씨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이 있다.
가녀린 각자의 필체가 왠지 정순왕후의 애절한 삶이 생각났다.

경복고등학교는 난생처음인데
내가 보기에는
"천하 명당" 자리였다.
뒤로 백악산이요,좌로 낙산에
우로는 인왕산에 앞으로는 남산이
얼마나 근사한가 말이다.
그런데...
듣자하니 청와대 경내에 그런 각자가 나와서 대단한 역사적
발견 운운하며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다고한다. 그러나 전문가 복수의 말로는
오래되지않은 각자로써
특별한 의미를 두지않았다고해서 "태산명동서일필"...비스므리

운동하는 장면들이 역동감있게 표현됐다. 어디선가 본 느낌인데...
대바람 소리가 근사할듯하다.

경복고 뒤로 백악산이 보인다. 젊은 새싹들이 좋은 기운을 받아서 나라의 큰 재목으로 쓰여지길 바란다.


운강대의 유래가 써있다.
여기서 운강은 조원의 호였는데 그는 29살때 선조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했다. 사실 조선시대때 과거에서 급제했다는 것은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뽑는 숫자가 워낙 적어서 하늘에 별따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기때문이다. 또한 그는 31살때 사간원 正言으로 선조에게 탕평계책을 상소했고 당파의 수뇌를 파직하라고 했으니 "조선 선비의 기개"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글씨는 단정했고 각자바위도 조촐했다. 조원의 아들 희진은 당대 명필로 알려졌으며 현재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알수없다고한다
운강대 각자바위 오른쪽에는 "효자유지"라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조원의 장남 희정과 차남 희철 형제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으로 부터 어머니를 보호하려다 목숨을잃은 내용이 있다 . 또한 "효자동의 유래"가 위와같은 일로 생겼다는 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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