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의 몰락은 대기업이 앞세운
멀티플렉스의 때문일까...
그러나 모든 것은 생몰을 벗어날수없다.
하나가 지면 또 다른
하나가 나오니
이제는 넷플릭스와
유튜브같은 새로운
영상시대가 펼쳐졌다.
단성사에서 영화 몇편은 봤을 것이다. 누구와 보았는지...
기억에 없다.
차도르 일지 베일일지...
공사 가림막의 틈사이로 ...
확대해본 삼청동문의 "三"
좌우 어느 곳도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이곳을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이곳은 문이 닫혔다.
청계동천의 월담은
우아한 것이었다.
난공불락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청계동천처럼 두번째
도전이... 기다리고있다.
덕성 여고생들은 요즘식으로
보자면 상하의가
스킨식으로 몸에 딱 붙는
교복이었는데 까만색이어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고딩시절 정독 도서관을
오가며 자주 보았지만 아쉽게도
연애할 기회는 없었다.
(물론 다른 여학생을
따라갔다가 봉변 직전까지...ㅇㅎㅎ)
도서관에서
공부에
불탔던 것도 아니면서...ㅎㅎㅎ
펑퍼짐한 남색 주름치마의
풍문여고생들이 생각났다.
학교는 서울시에 팔려서
강남에 제비처럼 날라갔으니
학교재단은 뀡먹고 알먹은
셈이다. 그란디...
"서울공예박물관"이라...
관심있는 분야이지만
오늘은 썩 내키지 않는다.
풍문여고는 안동별궁이라
불리는 곳에 터를 잡았는데
일제가 국권을 침탈후에
최창학이라는 광산갑부에게
헐값으로 팔은것을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에게 몇번째
첩이었다는 안유풍이 매입했다.
후에 그의 증손자 민덕기가
증조모의 이름에서 "풍"과
증조부인 민영휘가 만든
휘문에서 "문"자를
가져와 풍문이됬단다.
(알면 알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왜냐하면 민영휘는
반민족문제연구소의 모교수가
말하길 을사오적을 훌쩍 넘는
악질 친일부역자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의 축재의 규모가
무려 친일의 대명사
이완용의 20배로
조선최고의 갑부였고
권세는 말할것도 없겠다.
더구나
그런 역도들이 만든 학교에서
우리의 새싹들이 자란다는
것에 얼굴을 들수
없었기때문이다.
아무튼 명성황후 민씨
일가들이 만들어낸 학교였다.)
고종과 민비의 명을 받아
민영휘는 일본이 합법?적으로
조선을 들어오게하는
대역죄인이되었다.
이로써 분단의 씨앗이었던
일제 식민지가 시작된 것이다.
좌로 인왕산과 우로 북악산이 보였다.
고층건물이 빽빽한
경복궁앞에 이렇게
너른 터가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숲을 이룬다면 광화문
육조거리의 광장과 멋진
볼거리가 될것이다.
늦었지만 토건이 미덕이었던
경제개발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21세기다.
고층건물을 열광하는
그런 시절이 아닌 것이다.
문화가 힘인 시대다.
풍전등화였던
조선말 구제불능의
조정에도 의인은 있었으니
대신 김석진이 그였다.
그는 을사오적을 처벌을
주장하며 자결하였던 것이다.
(그의 집이 있던 곳이
최근 문을 연 "송현공원"자리다.
조선왕조 실록 초기에
광화문 좌측으로 소나무 둔덕이
있었다는 말이 어원으로
오랜 역사가 있는 자리였다,)
그는 죽음으로써
마지막 "忠"을 다했다.
후에는 친일파 윤덕영일가의
손에 넘어갔고 해방후에는
미군대사관 숙소로 쓰였다가
대한항공으로 가서
최근에는 서울시의 소유로
됬단다.
조선조 시절에는 왕실과
사대부 가문들의 집들이
있던 권세가들 집터였던 곳이다.
출처/옛 그림으로 본 서울/저자/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