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탑골 공원

흰코끼리 2022. 2. 5. 07:49



























종로를 가게되면 흔히 보게되는
"탑골공원"을 들어가보았다.
종각과 조계사를 비롯해서 주변 명소를
가까이 볼수있었던 것에 비해
탑골공원안을 보게된 것은
모르긴해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입구에는 삼일문이 있었고
얼마간 들어가니 원각사지 유구와
복청교 유구들이 꽤나 큰 직사각형
석재들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었다.
건축물 지붕 추녀에 쓰였던 토수가 있고
신장상이나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것들인데
목이 없어진 모양으로 서있었다.
유교가 천하인 세상이었으니
조선시대 불상에 목없는 불상이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잠시후 삼일공원의 대표 유물격인
"원각사 10층 석탑"을 보았다.
거대한 유리벽에 갇혀진 모습은
석탑이 본래 가졌던 장엄함이나
아름다움을 사라지게했다.
보존의 불가피한 점이 있겠지만
여간 안타까운게 아니었다.
한때 한양 도성에서 최대 사찰이었던
원각사는 연산군때는 기방을
만들었다니 종교를 떠나서
연산군의 기행은 박근혜대통령
탄핵때 방아쇠가 되었던
이른바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나왔던
말처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생각하게했다"...
탑골공원은 배치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었고 주변에 세조때 세워졌다는
원각사비도 꽤나 큰 모습으로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듯한 모습이었는데
알고보니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보았던 경천사지 13층석탑이었다.
고려왕조때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또한
전통적인 우리탑과 달라서
이국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서울대 남동신 교수는
속동문선과 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이
13층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며
기존 일본학자 세키노의 의
10층설을 반박했다.
남교수는 세키노의 10층설외
현재의 10층설은
고고학자 김원용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원각사탑이 상단 3개층 부분이
탑에서 내려와 옆에 내려져있었는데
미군 공병대가 1946년에 기중기로 올려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고한다.
임진왜란시 가또기요마사가
일본에 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설이있었고
실제로 일제시대에 밀반출을
했다가 말들이 많아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고한다.
원각사 10/13층 석탑의 내력을
들어보니 사연이 깊은 석가탑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 탑 또한
영욕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낸듯했다.
(조선왕조와 일제시대와 박정희 시대등을
거치면서 원각사의 본래 모습은
찾을수없고 일제시대때는 탑의
일부를 뜯어서 판매했다는
외국인의 증언도 있었다.)
비각이 비석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것도 역시 비석의 위용을
가려서 모양새가 안났다.
비석을 자세히 보자니
비석의 머릿돌은 보통 그렇듯이
쌍용이 연꽃을 받쳐든 모습이었고
몸돌은 마모가 심해서 알수없으나
속 동문선에 실려있다고한다.
당대 명필인 강희맹의 글씨가
머릿돌 아래에 쓰였고
몸돌앞에는 문장가와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김수온,성임이
뒷면에는 서거정,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고한다.
거북이의 모양도 독특했는데
비석과 거북등의 연결부위인
좌대가 연꽃잎 형상을 돋을 새김 하였다.
거북이의 꼬리가 세개였고
꼬리와 다리의 문양을
물고기 비늘 모양을 했다.
그것도 특이했다.
전문가들은 예술성에 박한 점수를
주었는데 내가 봐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왠지 어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 석수들의
모습을 보자면 호랑이나 거북이에서
보듯이 표정이 익살스러운게 많다.
석인들의 모습도 왕릉의 석물이
아닌 다음에야 돌하르방이나 장승의
얼굴들도 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보면 까치와 호랑이같은 민화를
생각하면 쉽게 연상될 것이다.
...
탑골공원은 위에 열거한 두개의
문화재와 복청교, 원각사 유구등
세가지 문화재가 있었다.
탑골공원은
기미년 삼일운동의 발원지로 조선의 혼이
살아있음을 온세계에 알리었고
(공원내 손병희 동상과 한용운 비석이있다.)
80년대는 공원주위에 박정희 시절
세웠던 상가건물이 문화 유적
정화사업으로 주변정리를 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그래서인지 과거 단층 상가의 모습과
주변 풍경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탑골공원은 고려시대때
흥복사였고 조선왕조때는
원각사로 세조때 세워졌다.
그러나 유교가 국시인 세상에
세조의 권력과 불심은
찻잔속에 태풍이었을지 모른다.
...
동장군의 위세에 입춘은
어데가고 매서운 추위로
볼일을 간단히 마치고 집으로 내뺐다.
@뱀다리
이승만 정권시절 그의 동상이
탑골공원에 있었는데
분노한 시민들이 끌어내렸다고한다.
남산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레닌의 동상이 소련의 몰락으로
쓰러진 것을 보면
동상은 함부로 세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상운운 하기도 하지만
과거 제정일치 시절이나 왕정시절에
수많은 동상이나 건축물을
포함한 상징물들이 한줌의
재가 되버린 사례는 셀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좋을때면 탑골공원은
연세드신 할매,할배의 영역이니
태극기 부대의 따끈한 곳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 듣자하니 그 분들의
극단적? 경향은 나이에서 오는
좌절도 있지만 당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않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라는 말도 있었다.
대화의 단절은 다툼의 원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국가로 보자면 전쟁일 것이고
부부로 치자면...ㅎㅎㅎ
그러니 어렵다해도 포기하지 말고
제도권으로 수용할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
미우나 고우나 그들은 우리의 부모요,
어른들이 아닌가...
물론 우리들의 미래는 아니길 빌지만..
현재 탑골공원은 탑이 있는 동네라
탑동이나 탑골로 불리웠다.
탑골 공원이 세워진 것은
조선왕조 말 고종 재위기간때
브라운이라는 서양인 고문의 제안으로
만들어졌고 이름도 서양식 이름인
"파고다 공원"으로 불리며
한양 도성에 최초의 근대 공원이 되었다.
(참고로 조선 최초의 근대공원은
인천 자유공원이란다.)
한때는 원각사 10층석탑이
하얀색으로 보이는 탓에
"백탑"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지금은 삼일운동의 발상지로써
대문에 삼일문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삼일문"은
강릉객사를 원형으로 만들었다는
기사가 있었고 보기 드물게 상량문도
한글과 한문이 함께있다고한다.
그런데 삼일문의 글씨도
한때 박정희의 글씨였는데
지금은 내려져서 예전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었다고한다.
"앙부일구 좌대"도 ...
다음에는 이번에 못본 다른 것들과
함께 꼭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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