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이한 김민기뎐2

흰코끼리 2024. 7. 29. 19:33

그의 고단한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그는 외롭지 않았다.
학전은 김광석이기도 했다. 물론 설경구,황정민등 많은 별들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학전 간판 대신에 아르코가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그의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오늘도 엄마 손을 잡고 오갔다.
지하철 1호선은 김민기고 학전이었다.
"겨레의 노래"는 김민기의 선배이기도한 송창식이 참여했다.
한겨레 신문에서 겨레의 노래를 만들었다. 김민기는 겨레의 노래사업단 공동위원장이었다.
학전의 시작은 본의? 아니게 넉장의 음반을 순산?하게 되었다.
한대수 이름이 보인다. 첫번째 음반에 김민기 본인외 다른이는 그가 유일하다.김민기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있다.
김민기 음반 발매년도를 알수있다 1971년.
"1987.9.5"라고 인쇄되있다.재발매 년도다.

김민기는 부평의 가죽공장과 경기도 전곡외 기타 지역에서 농업을 경험했고 탄광촌등
민중들의 열악한 삶속에 담금질은 현재 김민기의 "원천"이었다.( 그의 노동자,농민과 어린이 사랑은 이런 따듯한 서사가 있는 것이다.)

노찾사 1집은 김민기가 기획자였으나
제작자와 참여자
어느 곳에도 그에
이름은 없었다.
이유는 합법음반이 일차

목적이기에 노래는
최대한 순화했고
예상되는 불편한 일은
사전에 제거했다.
(그러니 그가 말한 "뒷것"은
여기서도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낯익은 인물에는 가객 김광석과
국악인 김영동이 보인다.
건전가요?에
너와 내가의 조용남이
눈에 띤다. 모르긴해도
어짜피 넣어야될 건전가요니
지인의 노래로 차선?을

선택했을듯...요즘
젊은이들에게
건전가요를 말한다면
설마?...라며,
거짓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었다.
노래목차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낭송부분이
김민기 였단다.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노래 중간에 낭송같은
것을 다른 곡들에도 선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영화를 볼때면 경건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애국가를 불러야했다.
영화초반에 순정?공인광고인
"배달의 기수"를 보면서
국가주의는 마약처럼
관객들의 영혼을
애국주의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나 그정도는 애교였으니
피가 튀고 화염병이
날라다니는 시위현장에도
국기하강식에는
모든 것은 중지되야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필수였고,
음반을 들을때도 건전가요는
무조건이었다.
북녘땅 동포들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원시부족 애기도 아니다.
다행히도 정태춘의
"사전심의 반대 투쟁"의
결과로 건전가요?는 옛날 옛날
고랫적 일이되어 이제 사람들은
흐미해졌다.
1996년도 헌법소원에서 승소로
음반에서 정식으로 사라졌다.)
합법음반의 목적을 달성후
2집부터는 본래 하고자했던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고한다.

선배 예술인에 대한 배철수의

말은 공치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진심이
느껴졌기때문이다.
누가 그랬다.
70년대는 저항의 시대였다...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곳에는
전태일이 있었다.
그는 "나의 불멸의
활화산"이었다.
언젠가...
체게바라와 김남주가
그랬던 것처럼...
김민기도 그 자리에 ...


문예에 나름 관심있다는
나를 부끄럽게한
지하철 1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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